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의 힘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의 힘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여부를 묻는 투표를 사흘 앞두고 에든버러에 도착했을 때 거리의 분위기는 완전히 분리독립 찬성이 압도하고 있었다. 창문에 붙어있는 찬성 지지 스티커의 수나 독립을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 심지어는 반대 지지자의 인터뷰는 찾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번 투표의 최대 격전지이자 노동당 지지세가 강한 공업도시 글래스고는 더욱 그랬다. 독립찬성 지지자들이 반대지지 운동원들의 운동을 방해하는가 하면 반대 스티커를 찢고 떼어버리는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펼쳐지고 있었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한마디로 독립 찬성 지지자들의 세상이었다.
(사진: 최대 격전지 글래스고에서 분리반대 운동원이 붙여놓은 스티커를 찬성지지자가 떼어내고 있다(왼쪽). 막판 독립찬성 진영의 공격적인 운동이 이어지면서 취재진은 이런 광경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 바로가기 [월드 리포트] 독립은 막았지만 후유증 남아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20%p 차이로 뒤지던 독립찬성 여론은 투표일을 하루 앞두고 2%p 차이까지 따라잡았다. 영국의 3개 여론조사 기관 조사 결과 모두 부동층 제외 시 찬성 51% 반대 49%로 2%p 차이까지 좁혀졌다. 이러다 정말 영국이 쪼개질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런던의 정치권이 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당황한 영국의 여야 3당 수뇌들은 두고두고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스코틀랜드에 파격적인 자치권을 이양하는 공약을 주민투표 직전 발표했다.
(사진: 새먼드 자치정부 수반은 필자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즉석에서 인터뷰에 응해줬다. 새먼드는 한국의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는가 하면 기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 인터뷰를 하는 등 쇼맨십도 강하고 친화력이 강한 전형적인 정치인이었다.)
찬성 지지자들의 위세에 눌린 반대 진영 운동원들은 소리 안 나는 홍보활동에 주력하고 있었다. 여성 운동원들이 찬성 지지자들에게 욕설을 당하는가 하면 반대 운동원들을 배신자라고 공격하는 통에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다는 얘기들을 했다. 그래서 주로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집을 방문해 이성에 호소하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3개월째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한 운동원은 예스 진영이 하도 공격적으로 캠페인을 벌여 찬성여론이 높아 보이지만 바닥 민심은 절대 다수가 합리적 반대자이며 이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가 결국 투표소에서 승부를 가를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을 했다.
은퇴 교사이자 전형적 중산층인 스키너씨의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대부분의 중산층이 그렇듯이 스키너씨도 독립은 영국이나 스코틀랜드 양쪽에 모두 도움이 안 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데 스키너씨의 집 앞 나무에 반대지지 스티커가 붙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영국의 가정에서는 선거 때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스티커를 창문에 붙여 놓는 것이 보통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반대 지지를 표명하고 싶은데 창문에 붙여 놓으면 찬성 지지자들의 돌을 던져 창문을 깰까봐 나무 높은 곳에 붙여 놨다는 것이다. 스키너씨는 자신과 같은 침묵하는 확신에 찬 지지자들이 많다고 했다.
(사진: 스키너씨 집앞에 걸린 반대 지지 스티커. 스키너씨는 지금은 Yes들의 세상이지만 투표장에 가면 숨어있는 No 지지표가 많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위기에 몰린 반대 캠페인을 살린 구세주로 평가 받고 있는 고든 브라운 전 총리가 마지막 호소를 한 대상도 침묵하는 다수였다. 브라운 전 총리는 예스 캠페인을 겨냥해 "영국은 그들만의 국가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국가입니다"라면서 침묵하는 다수를 투표소로 나오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투표 당일 투표소에서도 거짓말처럼 'No'를 찍었다는 유권자들의 인터뷰를 더 많이 딸 수 있었다.
(사진: 독립투표 부결의 일등공신인 고든 브라운 전 총리. 스코틀랜드 출신인 브라운 전 총리는 투표 직전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의 행동을 촉구하는 명 연설로 반대 지지자들의 표를 결집시켰다.)
이번 스코틀랜드 주민투표처럼 이상과 현실이 대결할 경우 착시현상이 일어나곤 한다. 캠페인 측면에서는 독립을 하자고 외치는 쪽이 독립을 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쪽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고 명분도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독립을 하지 말자고 떠들고 다닐 수 있겠는가?
그러다 보니 거리 분위기나 캠페인이 실제 여론 보다 더 과장되게 보이게 만드는 측면이 있을 수밖에 없다. 스코틀랜드처럼 고령인구 비율이 높은 상황에서는 더 더욱 '침묵하는 다수'의 힘이 클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번 주민투표 결과에서도 찬반 격차가 10%p로 집계돼 투표 당일 아침에 발표된 2~5%p의 격차보다도 훨씬 큰 차이를 보였다.
(사진: 결과 발표 직후 환호하는 반대 진영(왼쪽)과 좌절하는 찬성 진영(오른쪽). 독립 찬성 지지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향한 스코틀랜드의 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도 선거 때마다 "대 이변"이니 "예상 밖의 큰 격차"니 하면서 호들갑을 떠는 일들을 종종 보아왔다. 그러나 과연 그게 "예상 밖"이었을까? 우리는 그동안 침묵하는 다수, 밑바닥 여론을 모른 채 여론조사니 하는 통계에 기계적으로 의존해온 것 같다.
이번 스코틀랜드 독립투표에서 나타났듯이 아무리 한쪽으로 분위기가 달아올라도 조용히 자신만의 합리적 견해를 설정하고 행동에 옮기는 '침묵하는 다수'가 존재하고 이들이 민심을 만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http://media.daum.net/series/112950//newsview?seriesId=112950&newsId=20140928071105709
|
__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