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토로라 인수한 레노버의 셈법
레노버가 모토로라를 인수했다. 구체적으로는 구글이 갖고 있던 모토로라 모빌리티의 스마트폰 사업을 흡수하게 된다. 인수가는 29억1천만달러로, 인수시점에 14억1천만달러를 지불하고 나머지 15억달러는 3년 동안 약속어음 형태로 지불한다.
레노버가 갖게 되는 권리는 모토로라 스마트폰에 대한 제품 브랜드와 '모토X', '모토G' 등의 제품 포트폴리오다. 레노버는 모토로라의 스마트폰 개발 노하우를 갖고 이후 레노버가 만드는 제품들은 모토로라 로고를 박아서 판매할 수 있게 된다.
특허 뺀 브랜드 인수에 초점
레노버는 모토로라 브랜드와 등록상표, 그리고 약 2천여개의 특허 자산을 갖고 온다. 이번 인수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특허인데, 구글은 모토로라 모빌리티가 갖고 있던 통신, 스마트폰 관련 주요 특허는 매각에서 제외했다. 레노버는 2천여개의 특허를 가져오긴 하지만 모토로라의 핵심 특허는 구글이 갖고 있다는 얘기다. 대신 레노버는 이 특허와 지적재산권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라이선스를 갖는다. 특허를 이용할 수 있는 기간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로써 레노버는 지난 23일 IBM의 x86 서버 사업을 인수한 데 이어 구글의 모토로라 모빌리티도 쓸어담았다. 불과 일주일만에 일어난 일이다. 엄청난 쇼핑력을 과시한 셈이다.
레노버는 왜 이렇게 굵직한 기업의 중요한 사업을 인수하는 것일까? 한두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긴 어렵지만, 현재 레노버는 미래를 만들어내는 첨단 기술보다 현재 사업에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는 브랜드를 원하는 인상이다. 브랜드와 실속은 챙기되 인수가가 생각만큼 높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시작은 2005년 IBM의 PC사업을 인수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PC시장은 그야 말로 ‘폭발적’인 성장세였다. PC를 만드는 회사들은 모두 기록적인 성장을 했고, 시장은 PC를 만드는 족족 흡수했다. 집집마다 1대씩 있던 PC는 문자 그대로 개인의 ‘퍼스널 컴퓨터’가 됐고 심지어 한 명이 여러 대의 컴퓨터를 갖는 현상이 벌어졌다. 하지만 IBM은 이를 과감하게 정리했다. 세계 주요 기업들이 믿고 쓰던 ‘씽크패드’ 브랜드를 중국의 한 기업이 가져갔다. 시장은 충격에 휩싸였다.
이 때도 되돌아보면 레노버는 IBM의 PC만드는 기술을 인수하기보다는 ‘씽크패드’ 딱지를 산 셈이다. 심지어 레노버는 몇 년 동안 씽크패드에 ‘IBM Thinkpad’ 로고도 그대로 붙여 팔았다. 스스로가 만드는 제품에 레노버라는 이름을 붙이는 데 그리 집착하지 않았다. 대신 레노버는 IBM이 갖고 있던 PC시장에 거부감 없이 뛰어들었다. 단번에 이름을 세계 시장에 알리게 된 것이다.
기술보다 당장 필요한 브랜드 중요해
돌아보면 IBM은 PC를 처음 만든 회사이긴 했지만 그에 대한 상징성보다는 2005년을 PC시장의 절정기라고 분석했고, 인터넷 PC가 팔리면 따라서 성장할 서버나 클라우드 등 인프라 비즈니스에 집중했다. 하지만 레노버는 지금 당장 PC 판매량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을 원했다. 두 회사의 명확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자 사업 인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IBM의 x86서버 매각도 소재만 다를 뿐 거의 똑같은 이유로 분석해볼 수 있다. x86 서버 시장이 급격히 성장하고 있지만 IBM 입장에서는 판매량만 많고 수익이 박한 x86 서버가 사업적 가치를 갖는 것은 여기까지라고 판단한 듯하다. 대신 IBM의 브랜드로 리눅스와 윈도우를 돌릴 서버가 필요하다면 클라우드로 제공하겠다는 채비를 했다.
IBM은 결국 매각을 결심했다. 레노버는 늘어나는 중국의 x86 서버와 클라우드 구축 수요에 대응할 적절한 상품이 필요했다. 이미 중국은 정부와 공공기관을 비롯해 수많은 기업들이 레노버의 x86 서버를 구입하고 있긴 하다. 레노버로서는 IBM이 그 사업의 완성도를 높이고, 더 높은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열쇠가 된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치 9년 전 씽크패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이미 PC시장에서 갖고 있는 가격 경쟁력을 서버 사업에 더할 수도 있다. 레노버는 이미 프로세서과 메모리를 세계에서 가장 싸게 구입할 수 있는 회사다. 레노버라는 브랜드보다 IBM 브랜드가 해외 진출이 수월해지리라는 것 역시 경험으로 알 수 있다.
모토로라도 마찬가지다. 구글은 2011년 8월 15일 모토로라 모빌리티를 전격 인수했다. 안드로이드가 급성장하던 시기에 구글이 모토로라를 발판으로 하드웨어 사업에 뛰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지만 구글은 특허 포트폴리오에 무게를 뒀다. 당시 래리 페이지도 “모토로라의 특허가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등 다른 기업들의 경쟁에서 안드로이드를 더 잘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실제로 구글은 모토로라 그 자체의 사업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구글이 모토로라에 대해 배려나 혜택을 준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안드로이드 파트너 입장에서는 가장 방치해 둔 브랜드이기도 하다. 일부러 그렇게 한 인상도 줬다. 구글이 안드로이드를 이용한 뭔가 새로운 플랫폼을 테스트할 때 모토로라를 쓸 것도 같았지만, 이미 그런 시도는 삼성이나 HTC 등이 한발 앞서서 하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 모토로라의 하드웨어로 업계에 한 방을 날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있었다. 구글 입장에서는 안드로이드 파트너의 협력이 중요한데, 파트너들에게 막연한 불안감을 주는 요소를 품을 필요는 없다. 게다가 구글은 이미 '넥서스'라는 합작 브랜드로 하드웨어 시장에서 위치를 확실히 하고 있다.
하드웨어·가격·브랜드 경쟁력 얻어
레노버는 스마트폰 시장에 뒤늦게 뛰어들었다. 중국시장에서는 가장 잘 팔리는 스마트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역시 세계시장으로 뻗어나가기에 레노버라는 브랜드는 너무나 약하다. 아무리 씽크패드와 아이디어패드가 잘 팔린다고 해도 레노버와 스마트폰을 떠올리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모토로라의 이름이 있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약발이 떨어졌다고 해도 한때 세계 휴대폰 시장을 호령했던 모토로라다. 지금은 주춤하고 있지만 여전히 모토로라의 스마트폰 기술도 무시할 수 없다.
역시 양쪽의 적절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상황이다. 구글은 애초 목표로 했던 모토로라의 특허 포트폴리오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고, 고민거리였던 스마트폰 비즈니스는 털어냈다. 레노버는 그 브랜드를 손에 쥐었고, 특허 이용 라이선스를 얻어 실속을 다 챙겼다. 레노버로서는 당장 스마트폰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인수가도 싼 편이다. 애초 구글이 모토로라를 인수한 가격은 125억달러였다. 레노버는 알맹이가 좀 다르긴 하지만 29억달러에 이를 다시 샀다. 구글이 헐값에 판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구글로서는 애초 목표로 했던 수천 개의 특허는 여전히 손에 쥐고 있다. 그 특허들이 최근 삼성과 합의한 크로스라이선스에도 쓰이고,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개발이나 파트너사들에 제공하는 데 쓰인다. 더 많은 기기들이 특허 걱정 없이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것은 직접적으로 구글에게 검색, 플레이스토어 등 수익으로 이어진다. 특허가 더 중요했던 구글에게 브랜드만 30억달러 정도에 판다면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다. 레노버로서도 특허처럼 무거운 재산보다 현재 사업을 잘 할 수 있는 요소에 적절한 비용을 투자한 셈이다.
레노버의 모토로라 인수는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시장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시장 자체가 성능이 상향평준화되고 있다. 윈도우PC 시장과 비슷한 양상이다. 안드로이드는 그 자체로 완성도가 높아졌고 개별 제조사가 손댈 수 있는 여건은 줄어든다. 대신 판매량을 기반으로 누가 더 좋은 부품을 더 싸게 구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중국 제조사들의 급격한 성장 추세도 이와 관련 있다.
더구나 레노버와 모토로라는 모두 인텔의 아톰 프로세서를 쓴 스마트폰을 만드는 회사다. 지금은 안드로이드에 ARM이 대세지만 인텔이 스마트폰 시장에서 충분한 경쟁력을 갖게 된다면 레노버는 PC, 서버, 모바일을 가리지 않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칩을 단번에 구입하는 회사가 된다. 이는 꼭 인텔 뿐 아니라 퀄컴이나 엔비디아의 칩 공급을 자극할 수도 있다.
그간 성능과 하드웨어를 중심으로 안드로이드 시장에서 프리미엄 이미지를 만들어 온 국내 제조사들 역시 레노버의 모토로라 브랜드는 위협이 된다. 레노버는 여느 중국 기업들처럼 성능은 기본이고 가격과 소프트웨어에 모토로라라는 브랜드를 앞세워 중국과 북미, 유럽 등 시장 영향력을 떨쳐 나갈 저력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올해 안드로이드 업계는 중국 시장에 대한 고민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데, 레노버는 그 고민에 큰 짐을 얹어준 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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