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상권의 미래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편리하고 고급스러운 유명 백화점이 강남 지역엔 여러 곳 있습니다. 어디 백화점뿐입니까. 레스토랑도, 또 뷰티숍도 모두 최고 실력을 갖춘 전문가들이 최고급 서비스 경쟁을 하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하지만 강남 사람이라고 맨날 이런 곳만 이용하는 건 아닙니다. 간단하게 우유 사고, 옷 사고, 애들 학원 보내고 … . 이런 건 다 동네 가게를 이용합니다. 그렇다 보니 그 동네 상권은 그 동네 사는 주민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 줍니다. 어떤 종류의 점포가 많은지, 또 어떤 가게가 장사가 잘 되는지, 이런 것만 들여다봐도 나도 미처 몰랐던 나와 내 이웃들의 삶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江南通新은 앞으로 각 지역 상권을 분석하는 '우리 동네 상권'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첫 회는 압구정동 구현대아파트 단지 안 상가입니다. 과연 이곳 상권은 뭘 말해줄까요. 우리 사회가 향해가고 있는 고령화 사회의 상권 특징을 잘 드러낸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한번 볼까요.
① 압구정 구현대아파트 상권 분석해 보니
고령화 상권 특징 잘 보여주는 곳
보석집 12개나 되는데 햄버거집 하나 없어
지난달 10일 오후. 압구정동 구현대아파트 단지 안 상가를 돌아다니다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외국에선 특히 그렇지만 한국에서도 이럴 때 구세주는 맥도날드 같은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이다. 2000세대 넘는 아파트촌 한가운데에 점포 200여 개가 몰려 있으니 이 중 햄버거집 하나 없으랴, 싶었다. 게다가 단지 안에 초·중·고교가 다 모여 있으니 학생들이 좋아하는 패스트푸드점은 당연히 있으려니 했다. 그런데…,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 가게들을 죽 다시 챙겨보니 골목마다 하나쯤 있는 체인 피자집도, 김밥집도 보이지 않았다. 자장면 한 그릇에 7000원 하는 중식 레스토랑은 하나 있었지만 값싼 배달 전문 중국집은 하나도 없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압구정동 구현대 상권은 고령화 상권 특성을 잘 보여주는 곳"이라며 "급속하게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우리 사회의 상권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고령층의 구매력이 높은 만큼 상권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설명이다.
압구정동 구현대아파트 상가에 있는 점포
학군 힘 빠지며 10대 인구 확 줄어
구현대아파트 주민이자 이곳에서 30년째 부동산을 하고 있는 이인원(64)씨는 "20년 전엔 중국집도 많고 피자·햄버거 파는 가게도 있었다"며 "요즘 장사가 안되니 다 튕겨져 나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초·중·고가 밀집한 대표적 부촌(富村)에서 장사가 안돼 다 없어졌다니, 대체 무슨 까닭일까.
해답은 인구 변동에 있었다. 1994년과 2013년 압구정동의 연령별 인구표를 분석한 결과 압구정동의 10대 인구 비율이 절반 가까이 준 것으로 나타났다. 10대(10~19세) 비중이 94년엔 21.5%였지만 20년이 지난 2013년 현재 11.9%에 불과하다. 이 기간 압구정동 인구가 3만7800명에서 2만9100명으로 줄었다는 걸 감안하면 아이들이 얼마나 줄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서 교수는 "피자·햄버거·자장면 등의 주요 소비층은 10대"라며 "이 연령층이 급격히 줄어 피자 등을 파는 가게가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10대만이 아니다. 20대 비율도 크게 줄었다. 혹시 한국 전체에 몰아친 저출산 여파일까. 그러나 사교육 1번지인 대치동과 비교하면 이게 보편화한 전국적 현상은 아니라는 게 드러난다. 10대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대치1동은 24.6%, 대치2동은 20%다. 특히 중·고교 재학 중인 15~19세 비중을 보면, 압구정동은 6.15%에 불과한 반면 대치1·2동은 두 배가량 많은 12~13%대다.
다시 이씨의 기억. "전에는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에 애들이 바글바글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애들 구경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예요. 특히 중·고생은 더 찾아보기 어려워요."
10대와 20대가 줄었다면 비중이 는 건 어느 연령대일까. 30대, 그리고 50대 이상이다. 50대는 같은 기간 11.6%에서 13%로, 특히 60대는 4%에서 10.6%로 두 배 이상 늘었다. 70대(3.4%→10.6%)도 비슷하다.
장기 거주자가 많은 지역 특성, 그리고 비싼 집값으로 젊은 층의 진입이 어려워 고령자 비중이 점점 높아지는 건 쉽게 수긍이 간다. 그렇다면 30대는 왜 늘어난 걸까.
강남구청 관계자는 "압구정초에 자녀를 입학시키려고 전입해 오는 젊은 부부가 적지 않다"며 "하지만 고교생 자녀를 둔 가정의 경우, 특목고 등으로 많이 진학하는 데다 압구정고 등 인근 고교의 학업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아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옷 사러 멀리 안 가는 고령층 위한 수입 옷가게 많아
"여기서 옷가게를 하려면 40~50대에 맞춰야 해요. 싸구려가 아니라 고급으로요. 우리 가게 단골 중 한 분이 정윤희씨라면 대충 어떤 분위기인지 아시겠죠."
구현대 단지 내 상가에서 12년째 의류점을 하는 A씨는 "인근 옷가게는 대부분 30대 후반에서 60대까지 커버한다"고 말했다. 젊은 손님은 거의 없기 때문이란다. 그는 "예를 들어 블라우스도 몸매가 드러나지 않고 엉덩이를 덮는 게 잘 팔린다"고 설명했다.
구현대 단지 안 신사상가와 금강아케이드 건물 등에 가장 많은 점포는 옷가게다. 비좁은 2차로 도로 양 옆에만 의류점 30여 곳이 한눈에 들어온다. 간혹 성인 옷 사이에 아동 의류를 일부 진열해놓은 가게도 있지만 10~20대를 겨냥한 캐주얼 의류를 파는 곳은 한 곳도 보이지 않았다. 인근 또 다른 옷가게 주인 B씨는 "젊은 사람은 맘에 드는 옷을 사러 멀리까지 가기도 하지만 40~50대는 그런 걸 귀찮아한다"며 "또 오래 봐 온 잘 아는 주인하고 거래하려는 성향 때문에 여기서 주로 옷을 사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파는 옷 대부분은 수입 의류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 브랜드가 많다. 이곳의 옷가게 쇼윈도에는 '이탈리아 직수입'이라고 붙여놓은 광고 문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탈리아 제품만 판매한다는 또 다른 의류점 주인 C씨는 "잘 팔리는 옷은 펜디 원피스랑 막스 마라의 캐시미어 니트, 마르니 재킷, 그리고 돌체 앤드 가바나의 청재킷 등"이라며 "요즘은 브루넬로 쿠치넬리도 잘 팔린다"고 말했다. 그는 "이탈리아 브랜드가 고급스럽기 때문인지 이쪽 제품만 선호한다"고 설명했다.
구현대 단지 바로 옆에는 온갖 럭셔리 브랜드가 다 들어와 있는 현대백화점 본점이 있다. 버스 두 정거장 거리엔 한국에 명품관을 처음 시도한 갤러리아백화점이 있다. 이런 레드오션 속에서 백화점의 카드 사용 혜택 같은 경쟁력도 없는 동네 옷집이 버티는 비결은 뭘까.
B씨는 디자인과 가격, 두 가지 요인으로 설명한다. 그는 "우리는 백화점에 없는 디자인을 판매한다"고 말했다. 백화점은 많이 팔아야 하기 때문에 그 시즌에 잘나갈 만한 대중적 디자인을 사 오지만 이 가게들은 딱 '압구정 사모님' 취향의 독특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옷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소량 판매는 또 다른 경쟁력이다. 어느 가게건 모델별로 딱 1~2개씩만 갖다 놓는 걸 철칙으로 한다는 거다. 같은 옷 입은 사람을 아파트 단지 안에서 마주치는 걸 손님들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맞춤형 판매가 이뤄지기도 한다. B씨는 "가게마다 단골 10여 명은 확보하고 있다"며 "취향을 잘 알기 때문에 아예 단골에게 맞을 법한 옷을 사 와 연락하면 대부분 별말 없이 사 간다"고 말했다.
가격도 백화점보다 싼 편이다. 이곳에서 주로 옷을 산다는 현대아파트 주민 채모(51·여)씨는 "백화점에서 파는 캐시미어 제품 가격이 100만원이라면 여기선 비슷한 제품이 70만원 정도"라고 말했다.
대치동 은마·선경 상가에 있는 점포 고쳐서 오래 입는 알뜰族 많아 수선집 여럿
구현대 상가에 옷가게만큼 많은 점포는 옷수선점이다. 특히 금강아케이드 1층엔 가게를 구분하는 칸막이도 없이 상가 복도 자리에 미싱을 놓은 옷수선점 3곳이 나란히 붙어 영업을 하고 있다. 제대로 실내 점포를 갖춘 곳까지 합치면 8곳이나 된다. 단지 안 문구점과 병원을 합친 수보다 많다. 고급 이탈리아 브랜드를 즐겨 입는 부자 동네에 왜 이리 옷수선집이 많은 걸까.
"부자 동네라고 돈 함부로 쓰는 사람은 없다. 허튼 돈 안 쓴다. 다들 엄청 알뜰하다. 옷은 일단 비싼 걸 사지만, 그걸 10년도 넘게 고쳐서 입고 다닌다."
15년째 옷수선점을 운영하는 D씨의 설명이다. 중년층뿐 아니라 젊은 주부도 고객이다. 그는 "젊은 주부도 외국 브랜드 할인매장이나 인터넷에서 싸게 구입한 뒤 우리 집에 가져와 체형에 맞게 싹 고쳐서 입는다"고 말했다.
맡긴 옷을 찾아가던 주민 송모(51·여)씨는 "10년 넘게 이곳에 옷을 맡기다 보니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 식구들 체형을 잘 안다"며 "다른 데 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여기 살다 삼성동으로 이사 간 이웃이 있는데 이사 간 후에도 옷 수선하러 일부러 여기에 온다"고 했다.
까다로운 구현대 주민이 찾는 건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얘기다. D씨는 "대개 고급 옷을 다루기 때문에 수선 실력이 좋아야 한다"며 "여기 오기 전 대구에서 30여 년 의상실을 운영했다"고 말했다. 이 집엔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아내도 찾는다고 한다. 현대백화점 안에도 수선집이 있는데 말이다.
이사 후에도 단골집 계속 찾는 고객들
이곳 상권의 특징 중 하나는 동네 주민뿐 아니라 타지 고객이 많다는 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사 나간 옛 손님이 발길을 끊지 않고 계속 찾는다.
서 교수는 이런 특징을 신용과 익숙함으로 설명했다. 그는 "구현대 아파트는 노년층 인구 비중이 높다 보니 상권이 40~60대에 맞춰져 있다"며 "노년층은 새로운 것보다 익숙한 것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단지 안에 재래시장(신사시장)이 있다거나 최고급 백화점을 코앞에 두고 이탈리아 명품 옷가게가 유지되는 게 다 이런 이유라는 것이다.
장사하는 입장에서 단골 확보가 그만큼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대를 이어 장사를 하는 가게도 많다. 유명한 수입품 전문점 현대스토아나 과일가게 현대청과 등이 대표적으로 2대째 내려오는 가게다. 명절 때면 항상 현대청과에서 선물용 상품을 주문한다는 김석원(42·회계사)씨는 "아버지도 이곳 단골이었다"며 "어릴 때부터 여기가 제일 맛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다 보니 다른 곳 과일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다른 동네보다 보석가게가 많은 것도 비슷한 이유다. 신사시장 맞은편 1층 상가 골목에는 한 집 건너 하나씩 보석점이 있을 정도다. 이곳 보석점 주인 김모씨는 "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믿을 건 금밖에 없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 같다"며 "귀금속이야말로 믿을 수 있는 가게랑 거래하려고 하기 때문에 수요는 꾸준한 편"이라고 말했다. 삼성동 등 다른 동네로 이사 간 부자들도 귀금속을 살 때는 이곳으로 찾아온다는 거다.
주민 백인주(45·여)씨는 "자식 결혼 등 예물을 장만하러 오기도 하지만 재산 증식 목적으로 '보석 계'를 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보석 계란 이곳의 40~60대 주부를 중심으로 퍼진 계의 하나로, 현금 대신 금이나 보석으로 받는다는 게 일반 계와 다른 점이다.
중·고생 빠져나간 압구정동 vs 몰려드는 대치동
인구 구성 면에서 볼 때 압구정동과 대척점에 있는 곳이 대치동이다. 강남구 평균에 비해 압구정동은 유아·초등학생(0~14세), 이들의 학부모(35~44세), 그리고 노년층(60세 이상) 비중이 높다. 반면 대치동은 15~19세(중·고등학생)와 이들의 부모 연령대인 40~55세 인구가 많다.
그래서 단지 내 학원 구성에도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압구정동과 대치동 모두 단지 내 상가에 학원이 옷가게 다음으로 많다. 하지만 압구정동 구현대아파트 상가에는 태권도나 미술·음악 등 주로 유아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예체능계 학원이 많은 반면, 대치동의 은마아파트나 선경아파트 상가는 주로 중·고생을 대상으로 한 학습 관련 학원이 대세를 이룬다.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을 놓고 비교해 봐도 두 지역의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구현대 단지 안에서 볼 수 없는 맥도날드·서브웨이 등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을 대치동 선경상가에선 찾아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대치동은 압구정동과 달리 10대, 특히 10대 후반 인구가 많기 때문이다.
신현대 아파트에 사는 주부 김은정(38)씨는 "학군의 영향"이라고 말했다. "구현대에서 가는 인근 압구정고나 청담고 등 일반 공립고의 대입 성적이 안 좋기 때문에 교육열 높은 부모들은 자녀가 고학년으로 올라가면 대치동 등으로 이사를 간다"고 말했다.
대치초 학부모회장 이인영(42)씨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 대치동으로 오는 압구정동 애들이 많다"고 말했다. 압구정동 신현대아파트 주민 최모(45)씨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압구정동엔 일찌감치 외국으로 나가는 애들이 많다"며 "우리 애도 지금 미국 보딩스쿨에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차이점이 있다. 바로 중고 명품가게다. 구현대 단지 안에는 단 1개도 없지만 은마상가에만 9개나 있다. 이곳의 한 중고 명품가게 주인은 "학원비 등 아이들 사교육비에 쫓기는 엄마가 급전을 당겨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http://realestate.daum.net/news/detail/main/MD20130905091905447.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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